믿음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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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들은 선조나 후손이 대물려 신앙생활 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겨서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창세기 인물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그리고 손자 야곱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대물림 신앙 가문의 좋은 모델이다.
금산교회(전북) 조덕삼 장로의 아들과 손자 3대째 장로 이야기도 널리 알려졌다. 오래 전 이야기다.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목사기념관 현판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 장로(금산교회, 10대, 13-15대 국회의원)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 장로(대전제일교회, 고분자 화학박사)가 만났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히며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다면 우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 하고 정중한 인사를 했단다. 어르신들의 섬김과 나눔을 대물려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이 사랑방 화롯불 같이 훈훈하다.
조세형 장로가 2009년에 별세했다. 천정배 의원은 추도사에서 “김제에 이름난 기독교 집안이었던 당신 조부께서는 집안 머슴이 먼저 장로로 뽑히는 일을 기꺼이 지원하고 동의하셨습니다. 위아래 없는 민주적 가치가 바로 당신의 유전자였던 것입니다.” 하는 말을 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믿음의 가문이다.
조세형 장로의 조부 조덕삼은 지주였다. 1897년 어느 날, 경상도 남해에서 왔다는 17살 고아 이자익을 자신의 마방 마부로 들어앉혔다. 조부자와 이자익은 전주에서 찾아오는 테이트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어 함께 세례 받았다.
집사 직분(영수)도 같은 날 함께 되었는데 교인들이 장로를 뽑을 때는 이자익을 먼저 선택했다. 그 때 조부자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교인들과 함께 박수로 축하했다.
2년 후에는 조부자도 장로가 되었다. 그는 이자익의 믿음을 인정하고 결혼도 주선하고, 선교사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가서 신학 공부하는 것도 지원했다.
1906년에는 자비를 들여 유광학교를 설립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청소년 교육에 나선 것이다. 학생들은 날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
아버지를 이어 유광학교 교장을 맡은 조영호는 나라 사랑을 가르치며 태극기를 그리게 했다. 3․1운동 때는 그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런 일로 조영호 교장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당하다가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과 협력했다.
조덕삼 장로는 1919년, 52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주로 떠난 큰 아들 조영호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두 아들에게 “절대로 우상 섬기지 말고 제사는 지내지 마라. 예수 잘 믿어 나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 잘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 하였다. 조영호는 이듬해에야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자익 목사에게 찾아가 “목사님, 이제부터는 목사님 곁에서 아버님처럼 목사님을 잘 도와 드리겠습니다.” 다짐하고 고향에 주저앉아 유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25년에 이자익 목사가 호주장로교 선교부 요청으로 거창으로 떠났고, 조영호 집사는 1926년 6월에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다. 조 장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예배시간에 일본 천황궁을 향한 동방요배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경찰에 끌려갔고, 교회는 폐쇄되었다. 그런 강압 과 핍박 가운데도 교인들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일제가 망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1945년 8․15 해방으로 교회가 문을 열었다. 조영호 장로는 정치인들의 정치참여 권유를 뿌리치고 교회를 지키다가 1949년에(53세)에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갔다. 부인 이영숙 권사와 가족은 전주로 이사했다. 아들 세형은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대학을 나와 언론인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금산지역 목회자들이 서울에 사는 조세형 의원에게 조부의 대를 이어 금산교회 장로가 되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도 조부와 부친이섬겼던 고향 교회 장로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고 1999년 12월에 금산교회 장로로 장립했었다.
교회와 목회자를 섬기며 헌신한 장로들, 때마다 일마다 자신의 십자가로 믿고 지극충성했던 장로님들, 부러운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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